히라오카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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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변호사.
2. 생애 및 정치 활동[편집]
야마구치현 이와쿠니시 출신으로, 야마구치현립 이와쿠니 고등학교,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대학 졸업 후 대장성에 들어가 관료로 근무했다. 도카이재무국, 국세청, 도쿄국세국 등을 거쳐 주 인도 일본대사관 일등서기관을 근무했다. 이후 내각법제국 참사관으로 근무한 뒤 관료를 그만두고 고향인 야마구치현 이와쿠니시에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후 1999년, 고향인 야마구치현 이와쿠니시 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장 선거에서 낙선했다. 낙선 이후 2000년 42회 중원선에서 고향인 이와쿠니시가 속한 야마구치 2구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당시 상대가 사토 에이사쿠의 차남인 사토 신지였다. 야마구치현이 ‘자민번’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치적으로 자민당의 텃밭 중의 텃밭 지역인데다 야마구치 2구에는 사토 에이사쿠의 출신지인 타부세초가 속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놀라운 결과였다.[3] 이후 43회 중원선에서도 연속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44회 중원선에서는 자민당이 압승하면서 히라오카도 자민당 정치 신인인 후쿠다 요시히코에게 낙선해 비례대표로 부활해 당선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던 후쿠다 요시히코가 이와쿠니시 시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의원직을 사퇴해 보궐선거가 열리고, 비례부활로 당선됐던 히라오카는 이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다시 지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45회 중원선에서도 당선된 이후 간 나오토 내각에서 내각부 부대신 겸 국가전략실장, 총무부대신 등을 맡았으며, 노다 요시히코 내각에서는 법무대신을 맡았으나 4개월 만에 개각으로 물러났다. 이때부터 정치 인생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해 46회 중원선에서는 기시 노부오에게 밀려 낙선했다.
이후에도 2013년 참의원 재보궐 선거,[4] 47회 중원선에 재도전했으나 낙선했다. 이제는 개인기로도 먹히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47회 중원선 이후 변호사로 일하다가 2023년, 기시 노부오가 의원직에서 사퇴해 보궐선거가 열리자 3월 20일,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복귀했다.#[5]
3월 25일, 공산당에서 후보 공천을 철회하면서 야권 단일후보가 되었다. 야권 단일 후보로서 42대 총선에서 사토의 차남과 붙었던 시절에서 23년이 지난 이번에는 사토의 종증손(從曾孫)[6] 이자 기시 노부오의 장남, 그리고 아베 신조의 조카인 기시 노부치요와 붙게 되었다.
선거 결과 52.5%를 득표한 기시를 47.5%를 득표한 히라오카가 5%p 차이로 추격하는 결과가 나와 꽤 선전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국회 복귀에 실패했다. #
3. 소속 정당[편집]
4. 선거 이력[편집]
5. 기타[편집]
[1] 불과 하루 후인 1월 15일 오키나와 사회대중당 참의원인 다카라 데츠미가 태어났다.[2] 선거 당시에는 야마구치 2구 지역구에서 낙선 후 비례 부활을 했는데, 당선된 의원이 시장 선거 출마로 사퇴하여 열린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3] 이는 지역구 내 일부 보수 인사들이 히라오카를 지지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토 신지와 달리 자수성가한 엘리트라는 점에서 인물 경쟁력이 더 좋았던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4] 기시 노부오가 참의원직을 사임하고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공석이 되었다.[5] 정확히는 무소속 출마를 의도한 것은 아니고, 입헌민주당과 공천을 조율 중이었으나 당 차원에서의 공천에 부담을 느껴 입장을 보류하면서 히라오카 전 법무상 측에서 무소속 출마를 강행하고 당에서는 이를 묵인하기로 한 것이다.[6] 사토의 형 기시 노부스케의 장증손이다.[7] 희망의 당과 신설 합당[8] 국민민주당과 신설 합당[석] 석패율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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